벌써 여러 해 전부터, 네째형을 뒷받이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K라고, 별반 재산은 지닌 게 없어도 일에 대한 수완이 좋아서, 다년간 ××은행의 행원 생활을 거쳐, 시방은 어떤 유수한 국책회사의 중요한 과에서 한 계(係)의 주임으로, 가장 요긴한 일머리를 맡아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고 형이랄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음들음이 들은 바를 미루어 그의 사람 됨을 잘 아는 터인데, 도무지 그가 떠짊어지고 있는 간판허구는 얼리는 구석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꼬옥 사람 용한 술친구 같아서, 헙헙하고 이해에 어둡고 남의 말 잘 곧이듣고 재물 아깐 줄 모르고. 해서 점잖게 이르자면 군자요, 실없은 말로 하자면 어리석달 만큼 호인이었다.
채만식
1902년 전북 옥구 출신으로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에서 수학하였다.
사립학교 교원과 신문기자로 근무하다가 퇴사하고 향리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세 길로」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잡지 편집과 기자로 일하다가 1936년 작가로 전업하였다.
초기작으로는 단편 「불효자식」.중편 「과도기」가 있으며,
그 밖에 「가죽버선」,「낙일」,「사라지는 그림자」,「부촌」등으로 이 시기는 작가로서의 입문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인형의 집을 찾아서」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이라고 하겠다.
이듬해 발표한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작가로서의 면모를 획득하게 되었다.
채만식은 작가로서의 결실과 함께 친일부역작가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게 되는데
그러한 행적은 1948년 발표한「민족의 죄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치숙」,「탁류」,「태평천하」등이 있다.